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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뜬 저주(1)
    카테고리 없음 2021. 12. 4. 08:08

    20211127

     

    나는 불현듯 내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며칠 전부터 몸을 휘감았던 무기력함과 뻐근한 관절의 원인이 바로 저주였던 것이다. 

    번아웃이나 스트레칭 부족이 아니라 저주에 걸렸다는 증거가 있다. 어제 나는 검붉은 덩어리를 토해냈다. 그것은 마치 제 의지를 가진 것마냥 눈을 깜박였다. 핏발이 선 흰자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변기통에 물을 채 내리지도 못한 채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기절잠을 잤다.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깬 나는 화장실을 들렀다가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아주 기괴한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징그럽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순간 기체가 되어 사라졌다. 그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꿀럭거리는 공기는 마치 끈적한 액체처럼 보였다. 화장실 등에 반사되어 번들번들하게 빛나는 기체는 듣도보도 못했다. 기체가 사라진 자리는 평소의 공기보다 몇십 배 더 차가웠다. 마치 그곳만 겨울이 온 것같았다. 그리고 유해물질에 노출이라도 된 것처럼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건 뭔가 문제가 있다. 

     

    그 날 밤 꿈에 그것이 나왔다. 그것은 고통스럽게 피눈물을 흘리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전에 막 토해냈을 때에는 눈 하나만 간신히 뜨고 있던 모양새였는데 그 새 입이 달린 모양이었다. 짐승 내지는 형체가 일그러진 미물로 추측되었다. 그것은 무방비하게 바닥에 놓여져있는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 후로 아프기 시작한 것같다. 이번 생에서 저주는 커녕 신앙심과도 연관이 없던 나에게 이 것은 너무 갑작스러운 봉변이었다. 무기력하니 기존에 척척해내던 일도 할 수 없게되고 관절이 뻐근하니 운동은 엄두도 못내고 산책도 겨우 나갈 지경이 되었다. 

    아주 쇠약해졌다. 이 나이에 말이다. 나는 아직 21살 밖에 안 되었는데....그러나 어찌 저주에 사람의 의지 따위가 해결책이 되겠는가,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저주의 발현이 소름끼쳤던 것과 별개로 저주에 걸려 오히려 좋은 것도 있었다. 부모님께 빌붙어 사는 백수라 그래도 의식주는 해결이 되니, 저주에 걸렸더라도 흘러가는 상황에 몸을 맡긴 나는 그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빈둥대는 일밖에 할 것이 없었다. 심지어 저주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횡설수설하며 저주에 걸려서 그렇다고 이건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아주 강력한 것이라고 아무거나 뱉어대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더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지 한숨을 쉬고는 더 이상 말을 시키지 않으셨다. 그래서 안일했던 것인가, 아주 중요한 순간에 저주는 더 심해졌다.

     

    대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인 과제 마감 전 하루, 나는 그 하루에 모든 걸 바쳐 과제를 끝내는 편이다. 그런데, 그 날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심장에 저주가 덕지덕지 붙은 것처럼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이전의 무기력함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저주가 내 귀에 대고 너는 쓸모 없는 사람이니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속삭였다. 나는 내 몸 전반을 저주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었다. 저주가 하는 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괜찮을 것이라는 내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혈관에 끈적한 저주의 잔해가 흐르고 있었다. 몸에 털이 다 곤두서는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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